top of page
sub_top.png

Newscast

[내가 막가파가 된 이야기] 故 김명혁 교수_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전 총장, 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인터콥 고문

김명혁교수와 최바울 선교사
김명혁교수와 최바울 선교사

내가 막가파가 된 이야기

청송 교도소 설교   

사41:10


제가 작년 5월 13일 오후 1시 30분 여기 청송 교도소에 와서 수감생활을 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금년 5월 12일 오후 1시 30분 여기 다시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 2015년 11월 10일 오후 1시 30분 여기 세 번째로 다시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기학 목사님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 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오늘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게 되어서 너무 좋습니다. 제가 작년 5월에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금년 5월에는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를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내가 막가파가 된 이야기” 라는 좀 이상한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작년 5월 여기 와서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고,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이상한 분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다윗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독이 하늘에까지 상달한 니느웨 사람들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들과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같은 못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을 주님의 제자들로 삼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면서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23:34).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금년 5월에는 여기 와서 하나님께서는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와 같은 죄인들의 두목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신 이상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선주는 평양에서 유명한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선주 도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셔서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이기풍은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이기풍은 전도하고 있던 쌤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습니다. 그리고 깡패들을 동원해서 쌤 마펫 선교사가 세우던 교회당 건축현장을 모주리 때려 부시고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못된 깡패 두목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기풍아! 기풍아!” 라고 부르셔서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제가 금년 5월 여기 와서 설교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귀중하게 보시고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이상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를 부르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시고 목회자와 선교사로 사용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부르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앞으로 여러분들을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전파하는 귀중한 일꾼들로 사용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막가파가 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대로 저는 11살 때까지 북한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11살 때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북한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서 38선을 뛰어넘어 남한으로 와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한 평생을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아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의 한 평생을 너무 많이 축복해주셨습니다. 제가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뛰어 넘은 사건은 저의 인생과 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는” “막가파 인생”을 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특징 중의 하나는 두려움과 놀람을 모두 던져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막 달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막가파가 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작년 9월에 『‘장난꾸러기’ 김명혁 목사의 ‘막가파’ 이야기 모음』 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기질과 성격을 지니고 즐겁게 살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장난꾸러기’로 ‘막가파’로 살아오게 되었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게’ 살아오게 되었다. 참고로 ‘막가파’ 라는 별명은 나의 제자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임을 밝힌다. 결국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간 아브라함을 좋아하게 되었고, 막대기로 홍해를 가른 모세를 좋아하게 되었고,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아서 무너뜨린 여호수아를 좋아하게 되었고, 사자 굴과 풀무 불 가운데로 두려움 없이 들어간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사망아 네까짓 것이 무엇이냐?” 라고 호령했던 사도 바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너무 얌전한 것보다는 ‘장난꾸러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옳고 그른 것을 너무 철저하게 따지는 것보다는 ‘대강대강’ 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최근에는 의인으로 살기 보다는 차라리 ‘죄인으로’ 사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허물과 죄가 많은 부족하고 또 부족한 사람이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로 ‘막가파’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게’ 살아온 일들을 되 돌아보려고 한다.』    



제가 “장난꾸러기”와 “막가파”로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 16 가지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 이야기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우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장난꾸러기” 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렸을 때 장난을 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심한 ‘장난꾸러기’로 살았다. 나는 신의주에서 한 살부터 아홉 살까지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 노릇을 많이 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중국 사람들이 가꾸는 토마토 밭에 가서 주인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으면서 좋아하기를 여러 번 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신의주 제이교회 교회당 지붕과 교회당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가 교회의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 교회당 맨 꼭대기에서 한참 신나게 놀다가 친구 하나가 똥이 마렵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 한 장을 내어 주면서 그 위에 똥을 싸라고 했다. 그 친구는 종이 위에 똥을 쌌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똥이 담겨있는 종이를 손으로 들어서 멀리 이웃 집 지붕위로 내 던졌다. 모두들 너무 재미있어했다. 나는 이따금씩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 바닥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종이와 흙을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숨어서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좀 심한 장난을 친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친구들과 함께 썰매를 타고 그리고 숯불을 피워서 깡통에 담아 뱅뱅 돌리면서 이곳 저곳으로 달려가며 즐거워했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에 가서 수영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나는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지만 공부는 비교적 잘했다. 글쓰기를 잘해서 학교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어려서부터 아주 열심히 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 시간에 나가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나는 10살 11살 때 평양 제5인민(초등)학교에 다니면서 4학년과 5학년의 소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신의주 제이교회를 떠나 평양 서문밖교회의 목회자로 옮겨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양에 와서도 계속해서 장난을 많이 쳤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모란봉으로 대동강으로 이곳 저곳으로 놀러 다니며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즐거워했다. 몸을 날려서 남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는 기술도 익혔다. 나는 평양에 와서 신앙생활은 더욱 더 열심히 했다. 일요일마다 학교에 오라고 했지만 나는 일요일 날 학교에 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까지 당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주일성수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장난꾸러기’ 기질과 ‘막가파’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의 기질이 발동하게 되어 결국 나는 38선을 혼자서 뚫고 넘어 남쪽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11살짜리 어린 소년이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단 한 가지 이유와 목적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북에 남겨두고 혼자서 38선을 뛰어넘은 것은 대단한 ‘모험심’과 ‘담력’ 의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48년 8월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에 안내원 한 사람과 어른들 대여섯 명이 38선을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민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다. 그러나 나는 설 수가 없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40여 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 밭을 지나고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올 수가 있었다.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약간의 스릴을 느끼기도 했다. ‘막가파’ 기질과 함께 믿음을 지니고 달렸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청년이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서울로 간다고 대답했다. 누구와 같이 가냐고 물었다. 같이 오던 사람이 인민군에게 붙잡혀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결국 그 청년이 나를 기차를 태워서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 는 그 청년을 천사라고 생각한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 후 나의 한평생의 삶의 스타일을 결정한 의미 있는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이후 한평생 현실적으로 분석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근심 걱정 없이 계획 없이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막가파’로 ‘즐겁게’ 살아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제가 남한에 와서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성실하고 행복하게 했고 학교생활을 성실하고 즐겁게 했습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영락교회와 대구제일교회와 서울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했고 방산국민학교와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생활을 성실하게 했는데 신앙생활과 학교생활을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 군대 생활을 어떻게 ‘즐겁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만 간단하게 합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군대에 가서 군 생활을 했는데 군대 생활도 ‘막가파’의 기질을 지니고 ‘즐겁고’ ‘기쁘게’ 했다. 군 생활이 힘 들어서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논산에서 훈련을 받을 때 밧줄을 타고 높은 곳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밧줄을 타고 타잔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훈련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몰래 빠지려고 하는 데, 나는 한 번 하고 다시 돌아와서 두 번씩 하곤 했다. 총 쏘는 것도 너무 좋아서 다시 돌아와서 두 번씩 총을 쏘곤 했다. 총알이 위로 날아가는데 엎드려서 기어가는 포복 훈련도 재미가 있었고 수류탄 던지는 일도 재미가 있었다. 결국 나는 논산에서 훈련 받는 것도 그리고 7 사단에 가서 군 생활을 하는 것도 ‘즐겁고’ ‘기쁘게’ 했다.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군법에 저촉되는 것이지만 조용히 한다. 7 사단에서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사병들이 즐거워하는 시간 중의 하나는 저녁에 누군가가 부대 밖으로 나가서 동네 가게에서 과자와 빵을 사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사병들은 저녁에 부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장교만이 나갈 수가 있었다. 나는 가까이 지내던 군종 장교에게 장교님 군복과 모자를 좀 빌려달라고 했다. 그 군종 장교는 나처럼 장난끼가 있는 장교여서 나에게 군복과 모자를 빌려주었다. 나는 장교의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부대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것들을 사가지고 들어오곤 했다. 부대를 지키고 있는 사병들이 나에게 깍듯이 경례를 하면 나는 모자를 눌러 쓰고 점잖게 답례를 하곤 했다. 좀 지나친 ‘장난꾸러기’ 행위였지만 아주 재미가 있었다. 군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줄인다.』     



제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에서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한 후 미국으로 가서 12년 동안의 유학 생활도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즐겁고’ ‘기쁘게’ 한 이야기를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나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 생활도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즐겁고’ ‘기쁘게’ 했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에서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교수님들이 좋은 목사와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본래 듣기를 잘 하는 ‘듣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훼이스 신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입학허가가 왔다. 미국 필라델피아가 어디 있는지 훼이스 신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학비가 얼마인지 장학금을 주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무턱대고 ‘막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막가 파’ 기질이 발동한 것이었다. 비행기 값을 절약하기 위해 한미재단이 주선한 미국 군함을 타고 두 주 반을 걸려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배 삯104불을 내고 단 돈 100불을 주머니에 넣고 조그마한 가방 하나는 가지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후 12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교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은 일이 없었다.』     



『인천에서 배에 올랐는데 배를 탄 사람들은 전부 미국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고 한국 사람은 서울 문리대를 졸업한 졸업생 네 사람이었다. 유학의 길을 떠나는 한국 유학생들 네 사람은 모두 기대에 부풀었지만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면서부터 세 사람은 모두 배 멀미에 사로잡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했다. 일본에서 하루를 머무는 때에도 하와이에서 하루를 머무는 때에도 세 사람은 구경은커녕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나는 두주 반 동안 배 멀미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먹어보는 양식이 아주 맛이 있어서 음식을 아주 잘 먹었고 군인들의 가족들과 즐거운 대화도 나누었고 밤에는 밤잠을 잘 잤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해변에 가서 혼자서 수영을 했다. 두 주 반 걸려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삼일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달려서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훼이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교장 매크레이 박사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었는데 내가 총신에서 일년 동안 한철하 박사님으로부터 초대교회사 강의를 잘 들었기 때문에 매크레이 박사님이 강의하는 초대교회사 강의를 잘 들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매크레이 박사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출판사 대표의 신임을 얻게 되어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출판사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까지 벌게 되었다.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잘 열리는 것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훼이스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예일대학교 신학원과 아이오와 대학교와 아퀴니스 신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신학사, 신학석사, 신학석사, 철학박사 등의 학위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받게 되었고 예일대학교 신학원을 졸업할 때는 상장과 함께 상금까지 받게 되었다. 나는 상금의 대부분을 총신에 장학금으로 보냈고 일부는 농어촌 교회에 후원금으로 보냈다. 내가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이오와 대학으로 갈 때의 이야기 하나를 한다. 내가 아이오와 대학의 박사 과정에 입학이 허락되었지만 장학금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장학금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요구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많이 생각하다가 미국 동부에서 나의 헌 자동차에 짐을 모두 싣고 미국 중부 아이오와 시티로 무조건 달려갔다. 주임 교수인 포렐 교수님을 만났다.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도록 입학을 허락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장학금 하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그 장학금을 나에게 줄 것이라고 믿고 왔다고 말했다. 포렐 박사님이 나를 한 참 바라보다가 그러면 그 장학금을 나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장학금을 지급받게 되었고 포렐 박사님의 조교까지 되었다.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잘 열리는 것을 또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포렐 박사님이 나에게 어디에서 살려고 하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말했다. 포렐 박사님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물병원의 원장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내가 밤에 전화를 잘 받아주면 살 수 있는 방을 병원에 마련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동물병원으로 달려 갔다. 내가 수년 동안 살 수 있는 방이 무료로 마련된 것이었다. 호랑이를 포함한 내가 좋아하는 여러 동물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막 뚫고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재미 있는’ 일이다.』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마루 청소, 화장실 청소, 인쇄소 일, 도금 공장의 일, 접시 닦기, 판매원 일, 페인트 칠하기, 정원 가꾸기 등등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재미 있고’ ‘즐겁게’ 했다는 이야기를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귀국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면서도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당당하게’ 받은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1974년 가을에 귀국해서 목회와 교수 사역에 전념하고 있을 때 주일성수 문제에 부딪혔다. 1975년 말경 주민등록 갱신을 주일에 하라는 통보가 모든 국민들에게 시달되었다. 나는 그와 같은 정부 방침에 반대하면서 크리스천신문 11월 29일 호에 정부 방침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 정부는 교회를 장악하려는 나머지 주일에 국가고시는 물론 학도군사훈련까지 실시했다. 나는 정부정책을 비판하면서 1977년 11월 14일과 24일 한국교회의 지도적 인물 46명에게 주일성수에 대한 앙게이트를 보낸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응답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이 문제는 온 교회가 순교적 정신으로 강력하게 시정토록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합동 박목사). 결국 나는 정부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1977년 11월 20일 아침 남산 중앙정보부의 지하실로 붙잡혀 가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협박적인 심문을 받았지만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심문하는 두 사람을 책망하기도 했고 충고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했다. 주일 성수를 침해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일이라고 충고했다. 반공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심문하던 한 사람은 너무 기가 막혀서 스스로 화를 내기도 했다. 심문하는 두 사람이 잠시 쉬는 동안 내가 글을 쓰고 있으니까 무슨 글을 쓰냐고 물었다. 내가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기가 막힌 듯이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기 한 번 들어오면 언제 나갈지 모르는데 다음 주일 설교 준비를 한다니 말이 되는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나가고 안 나가는 것은 당신들의 소관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당신들은 다음 주일 후암교회에 와서 내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날 밤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책상 두 개만 있는 유리창도 없는 지하실 방이었다. 나는 책상을 간이 침대로 삼고 이불도 없이 그 위에서 단잠을 잘 잤다. 사실 나는 한 평생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밤 잠을 잘 자는 ‘막가 파’ 기질을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나를 깨우면서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올 때는 좋은 차에 태워주어서 왔는데 좋은 차에 태워주어야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나가서 지나가던 좋은 차 한 대를 세웠다. “이 분을 아무데까지 모셔 드리라”고 했다. 붙잡혀 가서 심문을 받는 것도 아주 유익하고 재미 있는 일이었다. 나를 심문하던 한 사람은 그 후 10 여 년 동안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전화를 걸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장난꾸러기’로 ‘막가 파’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게 되었다.』    



두 가지 이야기만 더 하려고 합니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했으며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들어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1999년 1월 19일부터 26일까지 북한의 아태위원회와 민화협의 초청을 받아 남한의 7명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양과 북한 일부 지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평양 공항에 내릴 때부터, 김일성 수령 동상 앞에 갔을 때부터 그리고 가는 곳마다 나는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을 했다. 김일성 수령 동상 앞에서는 일부러 경의를 표하지 않고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유롭게 행동을 했다. 비판의 말도 자주 했다. 우리 일행 7명은 평양 고려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나는 5일 동안 매일 한 번씩 호텔을 혼자서 몰래 빠져 나와서 평양 시내를 30분 또는 50분 동안 돌아다녔다. 평양 역 안으로 들어가서 시민들의 모습도 살피고 상점과 백화점에 들려서 물건 사는 모습도 보고 (나도 물건 하나를 샀다) 뒷길과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물론 나는 매일 경고를 받았으나 경고를 무시하고 5일 동안 매일 한 번씩 호텔을 빠져 나오곤 했다. 혹 잡히면 할 일이 있을 텐데 라고 생각을 하니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일행 중 어떤 사람은 불안해서 새벽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했는데 나는 매일 단 잠을 푹 자곤 했다.』     



『1월 21일에는 애국열사 묘지와 단군릉과 협동 농장을 방문했다. 나는 단군릉을 이렇게 웅장하게 너무 크게 지으면 너무 많은 돈이 낭비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1월 22일에는 황해도의 사리원과 재령을 지나 신천을 방문했다. 신천은 1950년 말 미군이 후퇴하면서 신천 지역의 주민 3만 5천여 명을 학살한 곳이라고 설명을 했다. 북한의 대표적인 사상 교육장이었다. 그리고 학살의 유물들과 사료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유물들과 사료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신천 학살 사건은 국제 조사단이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 범죄성 여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문제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저들은 그와 같은 질문과 제안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정식으로 강하게 항의를 했다. 그리고 북한 민화협 위원들이 우리들과 말을 할 때마다 ‘미국 놈들’ ‘일본 놈들’ 이라고 해서 나는 미국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고 일본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 ‘놈들’ 이라는 말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월 23일에는 묘향산을 방문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산의 바위에 “김정일 장군 만세” 와 같은 글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와 같은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말을 많이 하고 비판도 많이 하고 질문도 많이 하니까 나를 반동적인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북 조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여기 북 조선에 있어야 할 사람인데 남 조선에서 살고 있다는 말도 했다. 결국 저들은 겉으로는 항의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해를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편에 서서 마음을 쏟으면서 순수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결국 나를 귀찮아 하면서도 나를 이해하는 것 같이 보였다. 나를 지칭하며 "영 몰라 통 몰라" 라고 별명까지 부르며 농담을 할 정도까지 되었다. 내가 북한에 가서 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중에 스티브 린튼 박사에게 했더니 북한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스티브 린튼 박사는 나에게 이제는 북한에 절대 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바로 수년 후 나는 다시 종교 지도자로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내가 두 번째 북한을 공식으로 방문했을 때 민화협 위원이 내가 경고를 무시하고 5 번이나 고려호텔을 혼자서 몰래 빠져 나와서 평양 시내를 구경하며 돌아 다녔다는 이야기를 책에다 쓰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에게 항의를 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북조선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정치적이 아닌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하는 것이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하게 믿는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들어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나는 2005년 12월 15일 밤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아프간 쿤두즈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을 넘어 아프간에 간 일이 있었다. 두 번째 아프간 방문이었다. 그런데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이 꽉 막혔다. 우리 일행 7명이 비자도 없이 타직 국경에 도착했을 때 국경 통과가 폐쇄되었다. 국경 수비 군인들이 우리들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수가 없다고 강하게 말했다. 내가 하도 강하게 돌아갈 수 없다고 말을 하니까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장교 한 사람이 나를 오라고 했다. 내가 아프간에 세운 학교 준공식에 참여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지고 온 학용품을 전달하여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장교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타직 국경을 넘어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결국 나와 일행 7명은 모두 타직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프간 국경을 넘어서 아프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늦은 밤이고 비자도 없고 아프간 국경도 폐쇄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38선 국경도 넘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아프간 국경을 혼자서 넘기로 작정을 했다. ‘막가 파’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었다. 캄캄한 밤에 국경 통과의 허락도 받지 않고 3km나 되는 아프간의 국경을 혼자서 넘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 일행을 모두 타직 땅에 남겨두고 나는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혼자서 아프간을 향해 3km나 되는 캄캄한 밤에 국경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걷고 또 걸어서 아프간 땅에 도착했다. 나는 아프간 경비 군인에게 붙잡혔다. 나를 국경 수비대장인 들라워 장군에게로 데리고 갔다. 나는 들라워 장군과 20여분 동안 그의 사무실에서 대화를 했다. 내가 아프간 어린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학교를 하나 지어주었고 학교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왔으니 잘 보아달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다음 “대우 넘버 원, 현대 넘버 원, 코리아 넘버 원, 노 프로블렘 오케이” 라고 말하면서 국경 통과를 허락해주었다. 놀라운 일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 꽉 막힌 길을 ‘막가 파’의 기질로 확 뚫은 것이었다. 내가 들라워 장군에게 타직에 남아 있는 우리 일행과 선물을 가져오기 위해서 트럭 한 대를 타직 국경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그는 “노 프로블렘 오케이” 라고 말하더니 트럭 한 대를 타직 국경으로 보냈다. 조금 후 정정섭 장로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이 모두 도착했다. 너무 놀라운 일이었고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모험심’과 ‘담력’이 다시 통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두가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우리들은 쿤두즈 무라취드에 세워진 학교 준공식에 참석하면서 모슬렘 지도자들의 뜨거운 감사의 응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준공식을 거행하는 중 모슬렘 어린이들이 나와서 한국말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들은 모두 놀라움과 충격에 사로잡혔다. ‘막가 파’로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나는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저는 저의 ‘막가파’ 이야기 16 가지를 한 다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열 일곱째로, 앞으로 내가 걸어갈 수도 있는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도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고’ ‘기쁘게’ 걸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욥이 고백한 대로 나의 가는 길을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23:10). 베드로가 나중에 울면서 고백한 대로 내가 주님을 사랑 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그리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그리고 저들의 회개의 고백과 담력의 신앙 고백을 붙잡고 또 붙잡으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허락하시면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 길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기쁘고’ ‘즐겁게’ ‘막 뚫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담력의 신앙 고백을 너무너무 좋아하며 굳게 붙잡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9).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면서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나도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계속해서 펴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이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2011.3.29).』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 가는 동안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을 만나게도 된다. 병에 걸리는 일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일찍 죽는 일도 있다.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다. 우리는 그럴 때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며 원망하게도 된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한다(약5:11).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한다(벧전5:7).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분부한다(시37:5,55:22). 주님을 인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한다 (마5:11,12). 나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릴 때 이별한 일과 그리고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세상을 일찍 떠난 어린 아들 철원이를 일찍 이별한 일 때문에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픔이 보석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경험한 슬픔과 아픔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고,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으며, 천국을 사모하며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슬픔과 아픔까지도 아니 핍박과 죽음까지도 감사와 기쁨의 조목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성프랜시스는 살았을 때는 “가난은 나의 애처이고 고난은 나의 스승”이란 고백을 했고 죽을 때는 “나의 자매 죽음이여!” 라는 고백을 했다. 손양원 목사님도 꼭 같은 길을 걸으며 꼭 같은 고백을 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죄인 중의 괴수인 나에게 베푸신다면 나도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도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고’ ‘기쁘게’ 걸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1:15,17).』    



이것으로 “내가 막가파가 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여러분들, 재미있게 들으셨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십니다. 사실 “예수님” 이란 이름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부르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저와 여러분들이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 것이 얼마다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기쁘고’ ‘즐겁게’ 한 평생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여러분들 모두 주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41:10과 마9:13을 읽어드리므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