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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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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콥신학 매뉴얼

1. 인터콥 선교사역에 임하는 중에 사용할 기독교 복음의 개요, 총 19항목.
2.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신학지도 위원회의 자문을 받아 2011년 12월 작성함.

목 차

I. 머리말 --------------------------------------------- 2

II. 기독교의 기초적 교리들 ------------------------- 2

     1. 계시 -------------------------------------------  3

     2. 성경 -------------------------------------------  6

III. 하나님에 대한 교리 ------------------------------  9

     1. 하나님의 존재 ---------------------------------- 9

     2. 하나님의 작정 ---------------------------------  13

     3. 예정 --------------------------------------------  14

     4. 창조 --------------------------------------------  16

     5. 섭리 --------------------------------------------  17

IV. 인간에 대한 교리 ---------------------------------  18

     1. 인간의 창조 ------------------------------------  18

     2. 죄와 인간 ---------------------------------------  19

V.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  20

     1. 그리스도의 이름들 ------------------------------  20

     2. 그리스도의 본성들 ------------------------------  21

     3.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  22

VI. 구원에 관한 교리 ---------------------------------  25

     1. 성령의 인격과 사역 ---------------------------  26

     2.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  27

VII. 교회에 관한 교리 -------------------------------  28

     1. 교회의 본질 -----------------------------------  28

     2. 교회의 표지 ------------------------------------ 29

     3. 교회의 속성 ------------------------------------ 30

VIII. 종말에 관한 교리 -------------------------------- 30

     1. 개인적 종말론 ---------------------------------- 30

     2. 일반적(우주적) 종말론 ------------------------- 31

I. 머리말

인터콥 선교 공동체는 지난 30년 가까이 최전방 프론티어 미전도종족 선교를 위해 일편단심 푯대를 향해 전력하며 달려왔습니다. 그 동안 650여명의 장기선교사를 프론티어 이슬람권 및 10/40창 소수민족 집단에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늘 부족하지만 순종하고 헌신하는 우리 사역공동체를 통해서 수많은 선교 헌신자들과 선교동역자들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1993년부터 시작된 비전스쿨과 선교캠프를 통해 지금까지 20여만 명이 선교비전을 갖게 되었으며 한국교회 선교동원에 새롭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위대한 선교부흥의 시대에 한 부분을 감당하게 하신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며 경배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교회 관계에 있어서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왔으며 또한 특히 최근에는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외부로부터 지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가 더욱 인격적 성숙을 추구하면서 더불어 사역에 있어서 신학적인 오류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신학 매뉴얼 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초교파 선교단체로서 복음주의 신학기조를 분명히 하면서 건강하고 성숙한 한국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기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신학 매뉴얼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신학 매뉴얼은 2011년 한해 동안 한국교회 여러 신학자 및 선교학자들이 저희 공동체에서 강의한 '신학특강' 내용을 참고하였으며, 김재성, 이승구 교수 등을 비롯한 신학지도위원 몇 분의 지도와 자문을 거쳐 최종본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우리 선교사 여러분들은 이 신학매뉴얼에 기초하여 선교현장에서 현지인 제자들을 가르치고 양육함으로써 신학적으로도 건강하고 성숙한 현지 교회를 개척해 나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신학 매뉴얼에 미처 포함되지 못한 다른 주요한 내용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도 존경하는 여러 신학자들과 선교학자들의 지도와 자문을 받아 계속해서 배우면서 더욱 온전한 선교사가 되기 위해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주후 2011년 12월 12일
최바울 선교사


II. 기독교의 기초적 교리들

1. 계시
하나님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욥 1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만큼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는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셨고, 그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며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1) 일반계시


1) 의미: 하나님은 창조 세계 전체 안에서, 자연의 세력들과 위력 안에서, 인간 정신의 구조 안에서, 양심의 음성 안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세계를, 특별하게는 개인들의 삶을 섭리로써 통치하는 데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시 19:1, 2; 롬 1:20).


2) 일반계시의 불충분성: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완전히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보아야 할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죄가 이 계시를 변경시켰고, 인간이 이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능력도 변경시켰다. 인간은 죄로 인해 어두워졌기 때문에 자연에 새겨진 하나님의 글을 읽지 못하며, 오류와 왜곡의 힘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고 심지어 진리를 거짓과 바꾼다(요 1:5; 롬 1:18, 25; 엡 4:18; 골 1:13; 요일 2:9, 11).


b. 일반계시는 하나님과 영적 사실들에 관한 철저히 신뢰할 만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c. 일반계시는 기독교 신앙을 위한 토대로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일반계시를 힘입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권능에 관해 약간의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께 관해서는 배울 수가 없다(마 11:27; 요 14:6, 17:3; 행 4:12)

3) 일반계시의 가치와 중요성: 인간 타락 이후에 일반계시가 특별계시로 대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반계시를 쉽게 폄하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주신 이 계시가 여전히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다.


a. 이방세계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이방종교들에게 확고하고 항구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이런 사실에 힘입어 이방인들조차 자신들을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느끼고(행 17:28), 혹시나 하나님을 느끼고 발견할까 하고서 하나님을 찾고(행 17:27), 자연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권능과 신성을 바라보며(롬 1:19, 20), 본성으로 율법의 일들을 행한다(롬 2:24). 그들은 비록 무지와 죄의 어둠 속에서 살면서 진리를 거짓으로 바꿈으로써 진리를 왜곡시키고, 신들이 아니고 거짓과 허영인 신들을 섬기지만, 그럴지라도 로고스의 조명과 성령의 일반 사역에 가담한다(창 6:3; 욥 32:8; 요 1:9; 롬 2:14; 행 14:16, 17), 그 결과 그들의 종교들은 성경에 거짓으로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계시에 주어진것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서 섬기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게 한다.


b.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를 주실 때 단순히 이것을 원래의 일반계시와 나란히 두시지 않고, 그 진리들 가운데 인간들이 곡해한 부분들을 특별계시로써 바로 잡으시고, 그 진리들을 인류를 위해 해석해 주셨다.

(2) 특별계시


1) 특별계시의 필요성: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어두워지고 변질되었으며, 그로써 자연과 인간의 상황 자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글씨도 지금은 창조의 아침만큼 쉽게 읽을 수 없다. 그러므로 ① 오늘날 일반계시로부터 수집되는 진리들을 바로잡고 해석하는 목적, ②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 다시 한번 자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글씨를 읽을 수 있게 하는 목적, ③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의 계시를 제공하는 목적, ④ 인간을 죄의 세력부터 구속하고 그를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삶으로 다시 인도하심으로써 그의 영적 상태를 바꿔주는 목적 등을 위해 특별한 신적 역사가 필요하다.

2) 특별계시의 방편들


a. 신현 곧 하나님의 현현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그룹들 사이에 거하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불과 연기 나는 구름 속에, 폭풍 속에, 세미한 소리 속에 나타났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들로서, 이 징표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의 일면을 나타내셨다.


b. 직접적 의사전달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전달하셨다. 때로는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계시의 전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경우에는 제비뽑기나 우림과 둠밈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다(삼상 10:20, 21; 대상 24:5-31; 느 11:1; 민 27:21; 신 33:8).꿈은 대단히 공통된 계시의 방법이었으며(민 12:6; 신 13:1-6; 삼상 28:6; 욜 2:28), 이스라엘 이외의 사람들에게 계시가 임할 때도 사용되었다(창 20:3-6; 31:24; 40:5; 41:1-7; 삿 7:13). 선지자들에게는 보다 고등한 형태의 계시로 이상(환상, vision)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더욱 빈번히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말씀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증거했다(벧후 1:21). 우리는 선지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의 방식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구별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등의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였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절정적 사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었다. 히브리서 1:1-2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이며,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c. 이적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는 '기사,' '능력,' '표적'이다. '기사'(奇事, wonder)라는 말은 그것이 사람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능력'(power)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기적을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표적'(表蹟, sign)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는 표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세 단어 중, 표적이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적[표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셨다(신 4:34-35). 요한은, 자신이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몇 가지 증거하는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요 20:30-31).
※ 특별 계시의 성문화가 완성된 요한 계시록 이후의 상황에는 다른 계시의 방식은 중지되어져서 이제는 우리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특별계시와 접촉할 수 있다.

3) 특별계시의 내용


a. 특별계시는 구속의 계시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하게 된 일에 관한 지식,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활짝 열린 구원의 길, 변화시키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감화,그리고 성령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무들에 관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b. 특별계시는 언어 계시이자 사실 계시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 수단은 인간의 언어였다. 비록 사건 계시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건의 설명이 뒤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특별계시를 주심으로 우리로 그 계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그 말씀들을 객관적으로 명확히 성경책에 기록되게 하셨다.

c.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이다.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는 역사적 계시사건들이었다. 성경의 절반 가량은 역사이다. 하나님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d. 특별계시는 점진적(漸進的)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은 구약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또 특히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에 예를 들어 '뱀의 머리를 밟으실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아브라함의 씨'로(창 12:7, 22:18), 성막제도와 제사의 규례들로(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다윗의 씨'로 예표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점점 계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약시대가 되어, 그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로 최종적으로, 절정적으로 밝히 계시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있어서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며,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이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 점진적으로 더 확실하고 풍성하게 계시된 것이다.

4) 특별계시의 종결성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끝났는가 혹은 오늘도 계속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주신 특별계시들, 이미 성경에 기록된 그 계시들이 충족한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상 당신의 뜻을 충족히 계시하셨다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충족성을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한다(히 1: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신약 계시가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계시에 첨가할 또 다른 어떤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맨 끝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엄숙히 말하였다(계 22:18-19). 이것은 이 마지막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충족히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의 종결성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히 말해 특별계시의 이전 방식들의 종결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그 방식들은 지금은 중지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 이상 계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과거의 특별계시들의 기록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의 특별계시의 수단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2. 성경

(1) 특별계시와 성경의 관계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은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기록 혹은 저장(貯藏)이라는 관계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만큼 취사선택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성경에만 기록되었다. 성경과 같은 성격의 또 다른 책은 세상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유일한 저장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성경은 동일시된다.

(2) 성경의 영감과 무오(inerrancy)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영감(inspiration)이란, 성경의 인간 저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독특한 감동과 간섭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 저자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을 때보다 그것을 기록할 때에 받았던 성령의 감동을 말한다. 성경 영감의 결과는 성경의 무오(無誤)이다. 성경 무오는 일차적으로 성경 원본(原本)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성경은 모든 역사적, 교리적, 윤리적 진술에서 무오하다.

1) 영감에 대한 성경의 증거
① 구약 영감의 증거는 구약을 기록한 모세와 선지자들의 권위와 역할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견해를 전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민수기 12:6-8: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열왕기상 22:14: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거나 성경을 기록하도록 섭리하셨다. 출애굽기 34: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신명기 31:2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예레미야 3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성경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기록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지도하실 것을 전제한다.
② 예수께서는 친히 구약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그는, 당시의 정통 유대인들과 같이, 구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영감된 책으로 확신하셨다. 마태복음 4:4: "기록되었으되."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마태복음 22:43: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③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구약의 영감을 증거하였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이라는 뜻으로 성경의 영감, 신적 기원 및 신적 권위를 보인다.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사도행전 4:25: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 영감의 본질
성경 영감의 방식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신학적으로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라고 표현된다. 유기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을 사용하실 때 단순히 받아쓰는 도구가 아니고 인격체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 저자들은 때때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썼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단지 기계적으로가 아니고 인격적으로 사용하셨고 그들의 문학적 활동들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들은 그들의 독특한 문체, 성격, 타고난 재능, 교육 정도 등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기록한 내용은 하나님의 생각을 반영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

3) 영감의 범위
성경 영감의 범위는 성경 전체, 성경의 모든 책들, 또 각 책의 모든 부분, 심지어 글자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을 '완전 영감'(plenary inspiration) 혹은 '축자(逐字) 영감'(verbal inspiration)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번도 안 나오는 에스더나, 겉보기에 남녀 간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또 은혜의 복음 진리와 충돌되는 듯이 표현된 야고보서나, 매우 개인적 편지같이 보이는 빌레몬서 등도 모두 영감되었다고 본다. 또한 성경의 교리적, 윤리적 내용뿐 아니라, 역사적, 지리적, 혹은 과학적 사실들까지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또 성경의 단어까지도 영감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은 성경의 원본(autographa)을 두고 하는 말이며 사본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완전영감이 성경 원본에만 적용되고 사본들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본들에는 실제로 여러 가지 부정확함과 오류들이 있다면, 이런 영감의 교리는 실상 무가치하지 않는가라고 반론하였다. 그러나 성경 원본의 완전영감은 성경의 신빙성과 직접 관계된다. 성경 원본이 완전하게 영감되었다면 사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지만, 그 원본이 완전하게 영감되지 않았다면 성경의 신빙성과 권위성은 확립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성경 사본들 간의 차이점들이란 실제로 매우 작은 것들이며 특히 전통적 다수 사본들에 근거하면 원본의 본문은 거의 확정된다.

(3) 성경의 특성들

1) 성경의 신적 권위
성경은 성령에 의한 영감에 힘입어 내적인 권위를 지닌다. 성경은 그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참되고 절대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모든 내용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권위를 갖는다.

2) 성경의 필요성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강조하며, 반면에 신비주의 분파들은 성경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내적 빛, 즉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하시는 말씀을 훨씬 더 중시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쓰시지 않은 채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말씀을 교회의 씨앗으로 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말씀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변호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지금도 필요하고, 지상 역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여전히 필요하다.

3) 성경의 명료성
성경은 내용이 명료한 책이다. 성경의 명료성(明瞭性)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할만하게 명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목적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을 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며 구원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경이 결코 어려운 책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성경은 두 가지 점에서 명료하다. ①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알아야 할 내용에 있어서 명료하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말하기를, 그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요 20:31). 바울은 증거하기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다(딤후 3:15). 사실, 성경은 구원 진리의 기초가 되는 진리 전반에 있어서 명료하다. 시편 19:7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합 2:2). 예레미야는 장차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4). ②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는 생활 교훈에 있어서 명료하다. 그러므로 시편 119:105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불분명한 교훈은 결코 빛이 될 수 없다. 또 바울은,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말했다(딤후 3:16-17).

4) 성경의 충족성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충족히 전달하는 책이다. 이제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신약은 충족한 계시로서 더 이상 무엇이 첨가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그의 모든 뜻을 다 성경에 기록하셨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신약으로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것처럼 복원된 사도에 의한 새로운 계시의 필요성이 더 이상 필요 없다.

(4) 성경 해석의 원리

성경은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만일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지 않는다면, 성경의 목적이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며 성도들은 성경책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 해석에는 몇 가지의 건전한 원리들이 있다.

1) 문법적 해석
문법적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들의 뜻과 어순과 문맥 등이다. 문법적 해석은 많은 경우 문자적 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상식적인 해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대부분 단순한 문법적 해석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에 상징적, 시적 표현들이 있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에 대한 영적,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은 잘못이다.

2) 역사적 해석
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계시들을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역사 지식은 성경 해석에 많은 도움이 된다. 따라서 성경 해석자는 성경 역사와 더불어 동시대의 세속 역사에 대해서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역사 지식이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대체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뜻을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본다.

3) 신학적 해석
성경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성경 어느 곳의 좀 불분명한 의미는 성경 다른 곳의 보다 분명한 의미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은 바르게 진술하기를, "성경 해석의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의미가 여럿이 아니고 단 하나인 어떤 성구의 참되고 완전한 뜻에 관해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보다 더 명백하게 말하는 다른 곳들에 의해 그 뜻을 찾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점진성과 신약 계시의 최종성을 인정하면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그리고 신약 계시 안에서, 신약 계시를 넘어서지 말고 해석되어야 한다. 또 신약은 구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 계시는 구약 역사의 터 위에 주어졌다. 그러므로 성경 진리를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한 바른 신학에 의해 성경이 해석될 때, 성경 모든 부분의 뜻은 밝아지고 탈선된 해석은 방지될 것이다.


III. 하나님에 대한 교리

1. 하나님의 존재

(1) 하나님의 속성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1)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분에게 인격이 있다는 점도 내포한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 원인으로 말하거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의 원칙으로, 혹은 모든 것을 내포하는 우주의 목적으로 말하는 것은 인격성에 대한 무시이다.

3)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다.

4)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있으시며, 거룩하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진실하신 분이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나님(the triune God)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답은 "하나님께는 세 위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데 이 셋은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한 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 한 본체: 신구약성경은 온 세상에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한다(출 20:3; 신6:4; 사 44:24; 고전 8:6; 딤전 2:5) 하나님은 본질 혹은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하나님의 본체 혹은 본질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과 활동들의 공통적 주체가 되는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2) 세 위격: 위격(person)이란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는 이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있는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된다. 칼빈은 "내가 의미하는 위격은 신적 본체 안의 한 존재(substance) 즉 다른 둘과 관계되어 있으나 함께 나눌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존재(substance)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 강요」, 1. 3.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3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한 하나님 안에 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세 위격, 즉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된 세 위격이시다. 마태복음 3:16, 17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증거한다. 또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는 동일하게 세 위격들에 공통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본체는 위격적 특성에 의해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셋이다. 아버지는 참 하나님이시요 아들도 참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다. 교회 역사상 등장한 양태론과 삼신론은 배격되어야 한다.

a. 아버지
아버지는 세 위격을 대표하는 분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그는 아들과 관계하여 아버지로 언급된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요한복음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요한복음 8:54: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에베소서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b. 아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것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에라도 그것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존재적 관계에서 아들이시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특히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ηs)라는 명칭은(요 1:14, 18, 3:16, 18; 요일 4:9), 비록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자녀들에게도 사용되었지만(눅 7:12, 8:42, 9:38),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다른 여러 구절들도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암시한다(마 11:27; 요 5:18-25 등). 신성(神性)은 인격성을 내포하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요한복음 1:1의 '말씀'(로고스)은 인격성을 가진 신적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가장 잘 이해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아들은 참된 신성을 가진 자로 이해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아들의 출생은 영원하다고 이해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3은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라고 진술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5). '창세 전'은 시간 세계 이전이며 영원이라는 말로만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영원하신 출생이라는 생각은 하나님만큼이나 신비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간 세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들의 신성에 결함을 주고 결국 그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출생 관계는 영원적이라고 표현되어야 하며 아들의 영원 출생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c. 성령
제3위이신 성령은 성경에서 '영,'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불린다. '성령(聖靈)'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낸다. 그는 거룩하시며 거룩한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다.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 and from the son) 나오신다는 사실에 대해 논쟁하였다. 이것은 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도 불리신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1:19: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3) 삼위일체론의 핵심적 명제: 성경의 가르침과 공교회 신조, 그리고 여러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요즘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a. 오직 영원토록 불변하시며 살아계신 참된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곧 성부 하나님,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

b.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서로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분리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서로가 각각 구별된 위격들이시다. (삼위 하나님의 위격 간의 구별성)

c.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각 완전하시고, 그 신성과 권능과 영원성, 그리고 영광 등 모든 측면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본질의 하나님이시다. (세 위격 간의 신적 본질의 동일성)

4)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견해

a. 양태론(Modalism): 이것은 일체성을 극단화시킨 견해로서 삼위 간의 구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구속사의 각 시대에 때라 각각 3가지의 다른 양식(mode)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의 신적 본체를 가진 하나님이 창조와 율법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그리고 신약의 성육신에서는 성자 하나님으로, 그리고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단이다.

b. 아리우스주의(Arianism): 이것은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성자는 영원 가운데서 창조를 바라보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주장이다. 아리우스주의의 전형적인 주장은 "성자가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후에 아리우스주의와 정통파의 중간에 서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 아니라 '유사한 본질'(homoiousios)을 가지신 분이라고 주장했던 유사 본질파도 이단이다.

c. 삼신론: 이것은 일체성을 부인함으로써 삼위를 각각 나누고 분리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각각 분리되어 나누어진 별개의 세 하나님으로 보는 이단이다.

d. 종속설: 이것은 이단은 아니나 잘못된 견해로서, 성자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의 본체로부터 낳아지신 영원한 존재이긴 하나, 그 본질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며 종속된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작정

(1) 하나님의 작정의 본질

하나님의 작정(Decree)은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목적으로서, 그 안에서 하나님은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미리 정하셨다.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에서뿐 아니라 구속의 과정에서도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사도행전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정하신 뜻=경륜, 계획=council). 즉, 하나님께서는 미리 계획하신 다음에 아시는 것이다. 작정에 근거해서 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냥 우연히 일어나거나 운명이나 숙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작정의 특성

1) 하나님의 작정은 신적 지혜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완전하고 충만한 그의 신적 지혜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지혜롭고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평안을 찾을 수가 있다.

2)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며, 불변적이다. 삼위 하나님의 모든 계획하심은 일관되고 동시적인 결정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시 33:11; 엡1:4-5; 고전 2:7; 딤후 1:9; 삼상 15:29).

3) 하나님의 작정은 주권적이며,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것에 도움을 받거나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하심과 그의 기쁘신 뜻, 곧 그의 절대주권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정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에 따른 것이며, 또한 불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가 정하신 때에 그가 정하신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40:13-14, 14:24, 27, 46:11, 55:11; 잠 19:21)

4) 하나님의 작정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총제적이다(엡 1:11; 잠 16:4; 행 17:26; 욥 14:5; 전 3:1-11; 마 10:29-30). 즉, 중요한 일만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전 포괄적으로 계획하셨다.

5) 하나님의 작정에 있어 죄에 관하여는 허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를 유발하셨으므로 인간이 죄를 지어도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적극적인 원인자나 조성자가 아니시다(시 78:29; 행 14:16; 약 1:13; 전 7:29).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상반된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죄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이 죄를 짓도록 결정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죄를 짓도록 적극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통제하시어 마음대로 죄를 짓도록 용납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악한 자유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 세상에서 아무리 불행하고 악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모두 하나님의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 사용되므로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선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6)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를 구별해야 한다. 신 29:29: "감추어진 일(하나님의 작정)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율법)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작정적 의지(decretive will of God)는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세상에서 되어질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의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필히 그대로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이러한 작정적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오묘한 일들이 많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의해 이미 작정된 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교훈적 의지(preceptive will of God)만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에 의해 살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의 표현은 구약시대에서는 구약의 율법이고, 신약에서는 구약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이해해 적용한 하나님의 교훈과 신약 성경에서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교훈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인간은 그것을 따라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따라서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믿고, 교훈적 의지에 따라서 살면 된다.

7) 작정(하나님의 주권)과 의무(책임과 자유)라는 두 개의 축을 항상 똑같이 잡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는 세상의 숙명론 혹은 결정론과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작정은 인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들과 그것들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3) 작정의 목적

하나님의 작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사 43:7, 21; 엡 1:4-6; 롬 11:36; 계 4:11)

3. 예정

예정(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작정의 한 부분으로 구원에 대한 작정을 예정이라고 한다.

(1) 예정에 관계되는 구절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i)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ii)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그 기쁘신 뜻대로 iii)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iv)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v)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두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작정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2) 예정의 두 부분

예정은 선택과 유기를 포함한다. 이 선택은 인류의 일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선택 교리는 인류의 일부가 선택되지 않았다는 유기를 함축한다. 유기(reprobation)는 하나님께서 특별 은혜의 역사로 어떤 사람들을 간과하시고, 공의를 나타내심으로써 그들의 죄를 벌하시기로 하신 작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선택은 논리적으로 버려두심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면 그가 나머지 사람들은 내버려두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성경의 많은 말씀은 버려두심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다. 출애굽기는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증거한다(출 4:21, 7:3, 9:12, 10:27, 11:10).
신명기 2:30: "여호와께서 그[헤스본 왕 시혼]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여호수아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사무엘상 2:25: "그들[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
이사야 6:9-10: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6번이나 인용되었다.

4. 창조

(1) 창조 개관

1) 창조 개념: 창조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시되, 기존 재료를 사용하시는 일 없이 지으신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창조가 성부의 사역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도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창1:2; 욥 26:13, 33:3; 시 33:6, 104:30; 사 40:12, 13; 요 1:3; 고전 8:6; 골 1:15-17). 더욱이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였지, 어쩔 수 없이 하신 필연적 행위가 아니었다.

2) 창조의 시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에서 태초는 모든 시간적 사물들의 시작이며, 심지어 시간 자체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시간이 이미 존재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이른바 태초라고 하는 기존의 시간 가운데 어떤 시점에 우주를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상은 시간 안에서 창조되었다기 보다는 "시간과 더불어"(cum tempore) 창조되었다.

3) 창조의 방법: 하나님은 기존의 재료들을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창조하셨다(시 33:9, 148:5; 히 11:3)

4) 창조의 목적: 창조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 바깥의 어떤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고유한 탁월함의 표현 안에서 발견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주된 목적이 피조물들로부터 경배와 찬송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데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성들을 창조세계 전체에서 발견된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감탄을 자아낼 공허한 쇼나 전시로 의도되어 있지 않고, 피조물의 복지와 온전한 행복을 증진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영혼으로부터 감사와 사랑과 경배의 심정이 우러나게 한다(시 43:7, 60:21; 겔 36:21, 22, 39:7; 눅 2:14; 롬 9:17, 11:36; 고전 15:28; 엡 1:5, 6, 12, 14, 3:9, 10, 골 1:16)

(2) 영적 세계의 창조

1) 천사들의 존재와 본질: 성경은 곳곳에서 천사들의 존재를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며,그들이 실제로 인격을 지니고 있는 것을 소개한다. 천사들은 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은 사랑하고 기뻐하고(눅 15:10), 소원을 품고(벧전 1:12), 싸우고(유 9; 계 12:7), 예배하고(히 1:6), 대화하고(슥 1:9; 눅 1:13), 왕래한다(창 19:1). 그들 중 더러는 선하고 거룩하고 선택된 빛의 천사들로 표현되고, 더러는 원래의 지위에서 타락한 천사들로, 따라서 악한 천사들로 표현된다(요 8:44; 벧후 2:4; 유 6)

2) 악한 천사들: 선한 천사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일을 무너뜨리는 것을 낙으로 남는 악한 천사들도 있다. 이들은 선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았다(벧후 2:4; 유6). 천사들 집단의 군장 가운데 하나였음에 분명한 사단은 떨어져 나간 천사들의 뚜렷한 우두머리가 되었다(마 25:41, 9:34; 엡 2:2). 그는 죄의 창시자로 소개된다(요 8:44; 고후 11:3; 요일 3:8; 계 12:9, 20:2, 10). 악한 천사들은 초인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 능력을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분과 전쟁을 벌이고 그분의 일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한다.

5. 섭리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문답은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섭리의 일들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위들에 대한 그의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1) 섭리의 요소와 범위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두 요소는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보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단순히 자연법칙에 맡겨두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보존하신다(느 9:6; 시 36:6; 마 5:45, 6:26, 28). 특히, 하나님의 보존하심과 통치하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행위들과 일들을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시 103:19; 마 10:29; 단 4:17; 잠 16:9)

(2) 섭리의 목적

하나님의 섭리는 일차적으로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속죄 사역을 이루게 하셨고 성령으로 그들을 부르셔서 중생케 하시고 회개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심령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변화시키신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때때로 성도의 죄를 허용하심도 그의 유익을 위함이다. 성도는 이러한 죄와 실수를 통해 자신의 죄악성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더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이 가장 큰 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연합체인 세계적 교회를 완전하게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교회를 보살피며 모든 일을 그것에 유익하도록 처리하신다. 로마서 11:25, 26은,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놀라운 예언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의 세계적 구원 계획을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계적으로 모든 택한 자들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섭리의 중요한 한 목표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세계와 인류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의 구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6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3) 비상 섭리, 이적

하나님은 제 2의 원인(causa secunda)이 없이 직접 관여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2원인과 협력하여 사역하신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탄생에서 초자연적으로 아기가 생겼으나, 열 달 동안 사람들처럼 자연적으로 자라다가 탄생하였다. 시작은 초자연이었지만 그 다음은 자연적이었다. 출 14:15에 나타난 홍해를 가르신 이적은 제 2의 원인("밤새도록 분 동풍")를 사용하셨다.

(4) 섭리를 믿는 자의 자세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본다. 창세기 45:5-8에서 요셉은 비록 형들은 죄를 지었지만, 이것 조차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있음을 알았다. 요셉의 가족사나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또한 섭리를 믿는 사람은 감사, 용서, 인내로 살아야 한다.

IV. 인간에 관한 교리

1. 인간의 창조

(1) 인간의 기원

기독교의 인간관은 창조주 신앙에서 시작된다. 그 근거로는 창세기 1, 2장이며 신약에서는 마 19:4-5, 막 6:7, 눅 3:38, 딤전 2:13 등이 있다. 창세기 1, 2장은 인간창조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창세기1장은 어떻게 다른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을 위해 준비되었는가를 보여주며, 창세기2장은 특별히 유혹과 타락의 역사로 인도되기 이전의 인간의 본래적인 지위를 기술하고 있다.

(2) 인간 창조의 특성

인간 창조는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 비교하여 볼 때 유일하고 독특한 성격이 있다. 첫째, "하나님이 가라사대 ……. 우리가 만들자" (창 1:26)라는 표현은 인간 창조가 있기 전에 특별히 신적 협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둘째, 인간 창조의 독특성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다른 피조물에 대한 "각기 그 종류대로"(창 1:11, 21, 24, 25)라는 말은 "그들 자체의 전형적 형태로"(on a typical form of their own) 라는 뜻인데 유독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인간 창조의 독특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조성하신 과정에서 드러난다(창 2:7).
마지막으로, 인간 창조의 독특성은 인간에게 부여된 주재권에서 발견된다(창 1:26).

2. 죄와 인간

(1) 죄의 기원

성경은 인간 죄의 기원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으로 말미암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창조와 타락에 관한 기사는 분명히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죄는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사단을 유혹을 거절했다면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단의 말을 따랐다.

(2) 죄의 본질

창세기 3장을 개략적으로 살펴본 결과 죄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 의지에 관련된다. 죄를 사회적 차원으로 제한하면 안 된다. 죄를 사회적 차원으로 제한하게 되면 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만 성립되는 것으로 한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죄란 이웃에게 행해진 악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 핵심적인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죄란 하나님의 의지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둘째 죄는 본질적으로 죄책과 오염을 내포한다. 죄는 무엇보다도 죄책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제정 하셨다. 죄는 이 법을 지나칠 수 없다. 그래서 죄책이 발생한다. 또한 죄는 오염을 포함한다. 오염이란 모든 죄인들 속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부패를 가리킨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시험을 당하였을 때 아담은 시험에 굴복하여 타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타락이나 부패는 아담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연대적 책임 즉 인간의 대표가 지은 죄가 인류의 연대적인 책임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원칙에 의하여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들에게도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이는 아담이 인류의 조상으로서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의 대표자로서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한 것을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들이 그 죄를 물려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대한 응답은 만일 아담에 의하여 대표된 죄를 전승 받는 것이 정당치 않다고 항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대표된 의를 구속받는 자들이 받는 사실도 정당치 않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롬 5:18-19) .

(3) 죄의 보편성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은 죄는 이제 인류 가운데서 그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담의 타락과 관련된 내용이 끝나자 창세기 4장부터는 그 죄가 인류 가운데 어떻게 확산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노아의 활동시대인 창세기 6장에 의하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고 사람들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며 온 땅은 하나님 앞에서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었다고 했다(창 6:1-11). 이에 대한 심판으로 홍수가 임했지만 홍수 후 세대 역시 여전히 죄의 보편성은 여전했으며 사람의 계획하는 바는 여전히 악했다(창 8:21). 구약의 기록에 의하면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왕상 8:46; 시 14:1-3, 53:1-3등)라고 하여 여전히 죄는 보편적 위력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고 바울서신에서도 이 사실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 3:10; 엡 2:1-3).

(4) 죄와 죽음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로 인한 형벌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창 2:17). 또한 성경이 죽음을 언급할 때 한 가지 용례들만 사용하지 않고 다중적 의미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육체의 죽음 외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혹은 단절을 가리켜 영적인 죽음이라고 하는데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20)라는 구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IV.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1. 그리스도의 이름들

(1) 예수
이는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의 헬라어 이름이다. 이 이름은 "구원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마 1:21). 구약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또는 예시로서 존재한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기름붓다"라는 의미의 "크리오" 동사의 수동태 남성명사형이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의미로, 이는 히브리어 "마사" 동사(기름붓다)의 수동태 명사형이다. 구약시대에는 왕과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다(출 29:7; 레 4:3; 삿 9:8; 삼상 9:16, 10:1; 삼하 19:10).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열왕기상 19:1에 한 번 기록되었으나, 시편 105:15, 이사야 61:1에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기록이 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로 인해 거룩한 존재로 구별되고,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게 된다.

(3) 인자(그 사람의 아들)
"그 사람의 아들(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쓰셨던 용어이다. 반드시 정관사 "호"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용법으로, 당시에 어떤 사람도 이런 말로 일인칭 대명사를 대신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를 통해 자신이 다니엘 7:13에 나타나는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로서 오셨음을 나타내셨고, 또한 그 인성과 함께 신성을 드러내셨다. 주로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에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그것을 일인칭 대명사를 대신하여 사용하셨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효과적으로 은폐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효과적으로 계시하기까지 하셨다.

(4)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고백된 것이다. 마귀들도 이를 고백하였고,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백부장도 이를 고백하였다고 복음서는 증언한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마귀들이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을 막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상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시며, 또한 메시야이시며, 삼위일체 중 제2위이시다.

(5) 주
이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에 내포된 의미는 결국 그 신성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그 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다.

2. 그리스도의 본성들

(1) 그리스도의 본성들이 지니는 특징

1)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확신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인성: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 이심을 그만 두지 않으시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그가 참 사람이심을 또한 증거한다.

3)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답: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의 인격만 있으며, 그 인격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성육신으로써 인간의 인격으로 바뀌지도 않으셨고, 인간 인격을 채택하지도 않으셨으며, 다만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 영원 전부터 신적 본성을 지닌 하나의 신적 위격이 인성을 취하셨고, 그로써 이제는 부 본성을 지니게 되셨다. 이렇게 인성을 취산 뒤에 그리스도의 인격은 신적인 것일 뿐 아니라 신인적(神人的)인 것이 되었다. 즉, 이제 그분은 신인(the God-man)이시다.

(2) 기독론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오류들

1)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Alogi)파: 이들은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오셔서 그에게 메시야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요 1:14)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2) 아리우스주의(Arianism): 아리우스(250-336년경)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했다. 이러한 오류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정죄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심을 주장했다. 니케야에서 소집된 종교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라(호모우시오스)는 사상을 바른 견해로 선언하였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시라(호모이우시오스)고 주장했다. 이런 반(半)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이었다.

3) 가현설(Docetism): 초대교회의 아주 시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인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주의자가 그러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으며, 나아가 이러한 이원론에 근거하여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은 실제로 악한 물질인 육체가 되실 수 없다고 보았다.

4) 아폴리나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310-390년경)는,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3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과 몸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참 사람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5)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451년경 사망)는 신성과 인성의 참된 위격적 연합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서로 분리된 신이며 인간으로 2성 2인격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즉, 네스토리우스는 신적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6) 유티쿠스파(Eutychianism): 유티쿠스(378-454년경)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단성론'(一性說, monophysitism)의 선구가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7) 양자설: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주후 2세기)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이며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818년 사망)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入養)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1) 속죄사역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갈라디아서 1:4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 출애굽기 34:7, ". . .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어떤 이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우리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가망성은 없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적 표현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9,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2) 속죄의 의미

속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그것을 네 개의 단어로 표현한다.

1) 첫 번째 단어는 '제사'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사'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구약 제사의 기본적 의미는 제물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속상(贖償, expiation; 죄책과 형벌의 보상)이라고 부른다. 레위기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너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에 대한 규례는 안수가 죄의 전가를 의미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6:21, 22,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한적한 곳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 '산 염소'는 '아사셀'(아자젤)이라고 불리웠는데(레 16:10), 그것은 '내어놓는 염소'라는 뜻으로서 죄의 완전한 제거와 용서를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심으로 그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두 번째 단어는 '구속'(救贖)이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속전(贖錢)을 내고 건져낸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선택된 자들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고 그들을 사셔서 그들의 죄책과 형벌로부터 건져내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사도행전 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아포뤼트로시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9, 20, ". .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 안티뤼트론)으로 주셨으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세 번째 단어는 '유화'(宥和, propitiation)이다. '유화'란 진노를 가라앉힌다,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히브리서 2:17: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유화하려; 힐라스케스다이) 하심이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이니."
요한일서 4:10: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4)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네 번째 단어는 '화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좋은 관계로 회복시키셨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로마서 5:11: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린도후서 5:1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3) 잘못된 속죄설들

1) 사탄 속상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탄에게 속전(贖錢, ransom)으로 내어준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사탄 속상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며, 죄인에 대한 법적 권한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인 히브리서 2:14 은 그들의 생각을 지원하지 않는다.

2) 도덕감화설 혹은 모범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자기 희생적 사랑과 모범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계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로써 그들의 마음에 감사의 사랑을 일깨우고, 그 깨달음이 그들로 하여금 탕자처럼 참회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가게 하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그러나,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요 확증인 것이 사실이지만, 십자가의 의미가 그것뿐이라면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대속이 없다면, 여전히 우리의 죄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이 견해는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며, 그것은 성경적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큰 오류, 이단적 오류이다.

3) 도덕적 통치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미워하심의 표시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도덕 세계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가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를 교훈하셨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도덕적 통치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개념과 조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다. 그것은 단지 피조물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런 교훈적 의미뿐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복음도 없다. 그것은 성경적 복음을 부정하는 이단적 오류이다.

4) 신비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육신으로 그의 인성이 정결케 되셨고, 사람들이 그를 믿음으로 그의 새 인성에 신비적으로 연합됨으로써 의(義)를 주입받아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흔히 '신비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의 성육신을 중시함으로써 그의 죽음의 중요성을 부정하며, 또한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개념을 바르게 가지지 못한다.

(4) 속죄의 범위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에 대해서는, 역사상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보편속죄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속죄설이다. 보편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견해의 전제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핵심적 생각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 루터교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와 구별하여, 개혁교회는 제한속죄를 믿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대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VI. 구원에 관한 교리

구원론(Soteriology)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과정을 정리한다.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론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구원의 필요성과 방법과 결과 등의 주제들을 포함한다.

1. 성령의 인격과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의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전체를 포괄하는 대답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다.

(1) 성령의 인격성

성령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성령은 인격이시며, 하나의 막연한 힘이 아니시라는 점이다. 요 16:13-14, 14:26에는 성령이 "그"로 표현되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인격이심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는 영광과 존귀를 똑같이 돌려야 한다. 성령의 사역이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 종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결코 뒤지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님을 고백해야 한다.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고 "나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모세오경이 기록된 시대부터 약속되고, 실천되었던 것이지만, 성령께서 신약 교회 가운데 구속사적으로 임하신 이후로 더욱 강하게 실현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2) 성령 세례

"성령의 세례"에 관한 문제는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이후였음을 지적하면서, 우리도 회심 이후에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도 있으나, 오순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들과 함께 있던 자들의 삶 가운데 개인적인 사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순절은 옛 언약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바뀌는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언약의 주가 되셔서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통치하게 되셨음을 선포하는 사건, 즉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순절은 성령께서 구속사적으로 임하신 사건인 것이다.

(3) 성령의 사역

성령의 사역은 크게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으로 나뉘는데, 이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나눔과 같은 틀에 의한 구분으로서, 구원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일반 계시는 성령의 일반 사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은 택자들의 구원과 관련되지 않은 사역인 일반 사역과, 택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기 위한 특별 사역을 행하신다. 은혜론은 이 세상에는, 모든 복을 지닌 기독교적 삶 이외에, 구속적이지는 않지만 진, 선, 미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연적 삶의 과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이 완전히 타락하여 지옥과 같은 곳이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법, 질서, 국가, 학문 등이 가능해질 수 있다. 땅은 물론 가시와 엉겅퀴를 내지만, 그래도 사람이 힘써 경작하면 그에 합당한 소산을 내어 사람들의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죄로 오염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대부분 공유한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결과이다.
이 일반 은총의 열매는 ① 선고 집행의 유예, ② 죄의 억제, ③ 진리, 도덕, 종교의 보존, ④ 외면적 선과 시민사회의 유지 ⑤ 자연적 축복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죄악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고, 이들을 보존하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그리스도와의 언약관계로 부르시지는 않으셨는데, 이 부르심의 유무에 따라서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구분된다.

2.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 순서라는 것이 다르다. 이후에 제시되는 구원의 길을 시간적 순서로 오해하게 되면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는 구원의 여러 측면을 논리적으로 순서를 붙여 이해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1) 전제: 예정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에 우리는 예정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정 교리는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며, 이후에 논의될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의 의도와 열심히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2) 신비한 연합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이란, 간단히 말해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갈 2:20에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중재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며, 택자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또한 교회의 다른 형제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예정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3) 부르심[召命]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이 부르심이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예정 다음에 오는데,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에 의하면, 부르시기 전에 예정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셈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에로 부르시며, 이 부르심은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마련인데, 우리는 이를 "효과적 부르심, 내적 소명"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외적 소명"이라고 부른다. 내적 소명은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주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4) 중생(거듭남) - 회심(돌이킴) - 신앙(믿음)

칼빈주의에서는 소명 이후에 중생이 처음으로 따라오게 된다. 구원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고백하기에 중생을 먼저 두게 된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과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사건이지만, 논리의 순서로 보았을 때 돌이키는 것이 먼저이므로, 회심이 신앙에 앞서게 된다. 중생에 있어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거듭난 자들은 지금까지의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그런 인생의 방향 전환을 회심 또는 변개라고 하고, 여기에는 최초의 회개와 최초의 신앙이 포함 된다.

(5) 칭의(의롭다 함) - 양자됨

칭의와 양자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칭의는 법정적인 용어인 반면, 양자됨은 관계적인 용어이다. 칭의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을 보면, 칭의는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선포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 지위가 죄인의 위치가 아니라 의인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양자됨도 칭의와 같이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에 의하여, 믿음에 의해서 양자됨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됨 교리는 우리가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6) 성화(거룩하게 됨) 과 견인(붙들어 주심)

성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정적(definitive) 성화이며, 또 하나는 점진적(progressive) 성화이다. 단정적 성화란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한 존재라고 인정되며 거룩한 자들로 불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점진적 성화란 성도가 그 삶 가운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가며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통해서는 결정적 성화도 말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전 9:27 등에서 말하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겪는 자기 백성들을 놓지 않으시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다. 이를 참신자의 견인이라고 한다.

(7) 영화

구원의 서정에서 마지막은 영화다. 즉, 구원받은 무리들은 사후에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몸의 부활을 영화라고 한다. 로마서 8:30은 부름을 받아 칭의를 얻은 자들은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니, 이는 이런 일이 분명히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VII. 교회에 관한 교리

1. 교회의 본질

(1) 교회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임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교회의 본질의 성질에 관해서 그 의견의 차이를 현저히 보이고 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을 외부 또는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그들은 '교훈하는 교회'로서의 이 단체와 '교훈을 받는' 혹은 '설교를 듣는 교회'로서의 신자들의 공동체를 구별지어 놓았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회에 관한 외부적인 개념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영적 교통에서부터 교회의 본질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생각하지, 조직이나 다른 것을 교회로 보지 않는다.

(2) 교회는 유형적이면서 또한 무형적이다.

모든 참 신자들의 교제라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교회는 분명히 무형적(불가시적)이다.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과, 그들이 행하는 모든 신앙적인 행동을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의 신앙 자체를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교회로서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그 모임이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라고 불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영적인 영역을 가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당연히 불가시적이다.
그러나 또한 교회가 유형적인 모습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분명 교회이다. 그들 가운데 불신자가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 모임을 교회가 아니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형적 특성을 무시하는 것 역시 옳은 태도가 아니다.

(3) 교회는 보편적이면서 또한 지역적이다.

교회라는 말에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의미도 들어 있고, 또 어느 한 지역에 존재하며 매 주일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지만, 또한 어떤 특정한 지역에 존재하는 지역적인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

(4)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으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2. 교회의 표지

교회의 표지 문제는 종교개혁 때에 생겨난 것이다. 로만 가톨릭과의 대립에서, 참 교회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는 로마 가톨릭은 참 교회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2) 성례(세례와 성찬)가 바르게 집행되며, (3)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 모임을 교회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또, 어느 모임에서 전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성례를 순수하고 바르게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 모임을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도 교회가 아니다.

3. 교회의 속성

주후 381년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성경이 증거하는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을 잘 드러낸다.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다. 우리는 교회의 속성을 말할 때, 우리는 th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를 말한다. 즉,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을 언급한다.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리고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사람들이나 제도와 다를 바가 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성에 있어서 구별되어 거룩하다.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도 그 문호가 열려 있으며, 어느 지역이나 인종, 계층의 차별을 가지지 아니한다.

VIII. 종말에 관한 교리

종말론은 크게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뉜다. 즉, 개인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을 때에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1. 개인적 종말론

(1) 육체적 죽음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다. 창세기 2:36~17을 보면,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 데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즉시 죽었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의 죽음이 이제 피 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죄와 죽음과의 필연적 관계성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쳐 지고 있다. 로마서 5:12에서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가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고,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 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로부터도 구해내셨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2) 중간 상태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시대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인간의 영혼들은 구원의 완성이나 파멸의 절정을 기다리면서 "하늘"(heaven)에서 안식을 취하거나 "지옥"(hell)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성경 전체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서 중간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은 분명히 얻을 수 있다. ① 최종적 심판은 인간 사후 즉시 개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 마지막 날 백보좌 앞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다(단7:10; 롬14:10; 계20:12-15). ② 영생과 영벌의 장소는 그리스도 재림 후에 새로이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과 지옥 밖에 없다(마25:31, 46; 계 21:1-4,8). ③ 일단 생명이 끝나면 더 이상 최후 심판에 영향을 끼칠 회개와 범죄가 없다(시6:5; 눅 16:25, 26; 히9:27). ④ 성도는 육체적 죽음을 통하여 일단 영과 육이 분리되며, 성도와 불신자들의 영은 각기 중간기 처소인 "하늘"(heaven)과 "지옥"(hell)으로 가나, 육은 완전히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부활 시에 새로운 몸을 갖게 된다 (전3:21; 12:7; 고전15:44, 51-53, 눅16:22-25; 23:43; 고후12:4; 계2:7; 6:9-11; 7:9, 10; 20:13).

2. 일반적(우주적) 종말론

(1)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 논쟁 가운데서 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관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들과 비유들과 가르치심과 전파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역동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 가운데 이미 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극치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요,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이미 받는 것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심을 통하여, 혼인잔치의 초대를 받아들인 자들은 즐기며 행복하게 되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죽음을 당하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져진다고 하셨다(마 22:3-14).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마 21:43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라고 가르쳤다(고전 4:19-20; 롬 14:3). 아직도 미래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극치는 새 하늘과 새 땅, 즉 전우주의 완전한 갱신이다.

(2)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들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 사람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격들인 사람들의 친교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복음전파도 교육도 목회적 돌봄도 모든 훈련도 항상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계속되는 긴장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투쟁은 현재의 생활 전 영역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자화상(self-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소유했으며 동시에 아직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완성되지 못한 새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비록 긴장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성장으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은 새로운 자아는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어가고 있는 자아이다.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매우 간절한 소망 중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셨던 선한 일들을 완성하시게 될 시기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3) 시대의 징조들

1) 의미
일반적으로 시대의 징조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너희가 천기를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징조들을 분별할 수 없도다"(마 16:3).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중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세례 요한에게 이러한 징조들 중 얼마의 징조들이 어떠하리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마 11:5). 여기서 시대의 징조들에 관해 말씀하신 기본적인 내용은 그것들이 미래에 대한 언급으로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2) 시대의 징조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

a. 전적인 세상 끝날 만의 징조
이것은 마치 징조들이 재림직전의 기간에만 관계되어 재림을 훨씬 앞서는 수세기의 기간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3에서 예수께서 그 표현을 사용하실 때 시대의 징조들이란 분명히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있다. 신약에 묘사된 모든 시대의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기간과 그 기간의 모든 세대를 특징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은 교회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종용하고 있다.

b. 비정상적, 극단적 혹은 큰 재앙의 사건들
극적인 징조들은 구체적으로 사단의 왕국과 연관되어져 있다. 불법의 사람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더불어 임하리니"(살후 2:9)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땅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한다"(13, 14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극적인 징조들을 찾는 대신에 역사의 정상적인 과정 속에서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표징들을 분별하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진과 같은 큰 재앙의 징조들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징조들을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범주 속으로 국한시킨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c.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려는 시도들의 문제점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인자도 그의 재림의 말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막 13:32; 마 24:36). 만약 그리스도 자신도 그날을 알지 못했다면 그리스도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시대의 징조들을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재림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재림의 정확한 날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징조들을 통해서 미래 사건들의 정확한 시간표를 작성하려는 시도는 징조들을 가장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3) 시대의 징조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a. 시대의 징조들이란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크나큰 승리를 쟁취하셨으며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약속들을 성취하고 계시며 구속의 최후 절정을 우리고 깨닫게 하도록 힘쓰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b. 재림의 수반하게 되는 사건들이 언제 일어나게 될지는 말하지는 않지만 시대의 징조들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분명히 일어날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

c.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에 의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세상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추수 때까지 서로 함께 자라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간의 세력 사이의 분쟁이 역사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계속 되리라는 것이다.

d. 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께서는 시대의 징조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질책하셨다. 이런 시대의 징조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을 것을 권하고 계신다.

e. 시대의 징조들은 또한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마 24:42).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며 깨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써 섬긴다.

(4) 특별한 징조들

1)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a. 모든 민속에 복음이 선포됨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일이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며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백성들에게 언약으로서 주실 뿐만 아니라 열방(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삼으신다고 하였고(42:6)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40:5).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 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4:14; 막 13:10). 예수께서 말씀하시 것은 모든 민족(ethnic groups)에게 하나의 증거로서(a testimony) 온 세상에 전파되어 한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의 전파는 그 복음에 관한 한 모든 민족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은혜의 때이며, 이때가 곧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여 권고시켜 구원받도록 부르시는 시대이다. 따라서 위대한 위임명령에서 이 징조는 명령의 형태를 띠고 있다(마 28:19, 20). 오순절 사건이 후로 모든 세대는 복음을 모든 민족(ethnic group)들에게 전파해야 할 엄숙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그렇지만 이 징조가 언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이 징조가 완전히 성취될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시다고 우리는 먼저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b.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시대의 징조로는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을 계속적으로 전파하는 일은 위에서 다루었던 시대의 징조의 한 단면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도 분명히 모든 민족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서 11:25-26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의 의미에 관해 크게 세 종류의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그 충분한 수가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 국가가 전체 단위로서 (그렇다고 반드시 이스라엘 국민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대규모적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것은 결국 모든 선택 받은 자들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여기 모든 선택 받은 자들 속에는 전인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의 선택자들을 포함한다. 즉,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뜻을 단지 육체적 유대인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셋째, 유대인들 중 선택 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온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이 역사적으로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역사가 흐르는 전(全) 기간 동안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중에서의 선택자의 충만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바울 사도는 "그때에"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tote"나 "epeita"가 아니라 "후토스"(houto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후토스"(houtos)는 시간적 연속성이 아닌, 방법이나 양식을 묘사하는 접속사로서 "그리하여"(so)나 "이런 방식으로"(in this way)라는 의미이다.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해석은 다 허용 가능한 해석이다.

2)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환난, 배도, 적그리스도.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반항하는 시대의 또 다른 징조는 "배도"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0-1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면 종말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울의 "불법의 사람"과 요한의 "적그리스도"는 동일시할 수 있다. 불법의 사람은 큰 반역 흑은 큰 배도사건 후에 나타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일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어느 것도 대적할 것이며 경배 받는 그 무엇도 반대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자기의 대의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5) 천년기에 관한 교리

천년왕국은 성경의 교리들 중에서 매우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무천년설과 후천년설, 그리고 역사적 전천년설을 모두 허용해 왔다.

1) 무천년기설(amillennialism)
무천년론(무천년기설)이라고 해서 어떠한 종류의 천년기도 믿지 않거나 또는 천년기적 통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3-6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무천년주의자들"(amillennialists)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가 문자적으로 일천 년 동안 지상 통치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실현 과정 중에 있다는 입장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 첫 세 절 속에 언급 되어 있는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끝난다고 이해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이 천상적 천년기 통치 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무천년론자들은 미래의 영화롭고 완전한 왕국이 장차 올 새 삶의 새 땅 위에 건설될 것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은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심으로써 지금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이미 쟁취하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악의 왕국은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현세대에서 많은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시작된 종말론) 또한 최종적 상태 시에 시작될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결정적 미래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도 바라보고 있다(미래적 종말론). 그러므로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복음이 모든 나라들에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완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들은 재림 전에 한 명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이 극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한 한 사건이지 결코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부활사건 후에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신자들은 변화 받은 몸이 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때에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은 구름 속에 이끌리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이 모든 신자들의 "휴거"(들림)가 있은 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마치고 최후의 심판을 시작하시게 된다. 이 심판 후에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고 신자들은 새 하늘 과 새 땅의 축복들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2) 후천년기설(postmillenniaIism)
후천년론자들이 무천년론자들과 세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① 후천년론자들은 천년기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적 왕위를 가지고 가현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② 천년기가 전적으로 천 년 동안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③ 천년기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생각한다. 후천년기설에 의하면 지구상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으로써 현세대는 점차적으로 천년기 세대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후천년론자들은 로마서 11:25~26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이 유대인의 정치적 왕국이 회복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유대인 민족이 대규모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후천년기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대의견들이 있다. ①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대한 사건들 과거의 일들로만 처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② 요한계시록 20:1-6은 후천년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20:1-6은 현재의 세대 동안에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지 결코 미래의 황금시대를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미래적 황금 시대가 있다는 후천년론자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간에 있는 역사 속의 계속적인 긴장 상태를 올바로 다루지 못하며, 또한 지상 낙원 또는 지상 유토피아 비전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3) 역사적 전천년기설(historic premillenmalmm)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이 전천년적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후에 최종의 상태가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역사적 전천년기에 대한 다양한 반대 의견들이 있다. ① 요한계시록 20장은 그리스도 재림 후에 지상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을 결정적으로 증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Augustine) 이후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방법은 요한계시록 20:3-6이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고린도전서 15:23-24는 지상적 천년기 통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증거자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 중 어느 곳에서도, 최종상태 전에 천년기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③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아직 죄와 사망이 존재하는 땅으로 온다는 것은 그들의 영화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중간기 상태 동안 하늘의 영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신자들이 죄와 사망이 아직도 왕노릇하고 있는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④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상적 천년기 통치는 신약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사이에 제3의 세대가 있을 것이라고 어느 복음서도 사도행전에서도 서신들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4)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전천년설 자체는 2세기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오긴 했지만 교회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두 개의 별도의 백성들로 엄격하게 구별하는 교리를 지닌 세대주의라고 불리는 이 신학적 체계는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i, I800~1882)에 의해 시작되었다.
세대주의적 사고를 결정짓는 기본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①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근본적이고 계속적인 구별이다. ② 세대주의자들은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 개의 특별한 "시대"들로 나누어 취급한다. 구약성경은 미래의 어느 시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고대로부터의 언약 백성들이 주체가 될 지상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들을 담고 있다. 비록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에 관한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언약의 핵심적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물로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언약에서도 약속이 주어졌는데 곧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다윗의 보좌 위에 영원히 앉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첫 단계는 휴거(들림)로서, 이것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휴거에 있어서 전(前)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과 역사적 전천년기론과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즉, 역사적 전천년기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시대의 징조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반면에, 전자인 전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은 이 시대의 징조들이 그리스도 재림의 첫 단계가 발생한 후에 성취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휴거 때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이 땅에까지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만 오신다고 본다. 즉,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때에 교회라고 불리는 신자들의 무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칠 년 동안 어린양의 혼인 잔치 예식을 축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대하는 의견들이 있다. ① 세대주의적 견해는 구속역사의 다양한 기간들 간의 차이점들이 그 역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제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② 이스라엘과 교회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세대주의적 견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 내지는 분리의 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제거되었다는 사실과(엡 2:14~15) 모순된다는 것이다. 또한 시온과 예루살렘이란 용어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히 12:22-24, "하늘의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일군의 구속 받은 성도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미래는 이방인 신자들의 미래와 분리되지 않고, 또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일천 년 동안 지속될 팔레스틴 지방에서의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공유하고 나누게 될 영원한 축복 상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③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팔레스타인 그들의 땅에서 천년왕국을 건설하게 된다는 세대주의적 견해는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본토 회복에 관한 구약 예언들이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로운 미래를 기대하고 있지만, 이러한 영화로운 미래가 이스라엘인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받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④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견해와, 교회는 괄호에 해당하는 세대주의의 견해는 동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⑤ 세대주의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에도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기대는 성경적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⑥ 천년기에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지상적 왕국을 세워지고,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적 왕위에 앉아 개종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면 요한계시록 20:4-6에 기록이 되어야 할텐데 전혀 그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6) 부활
그리스도는 출애굽기 3:6에서 이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셨던 것이다. 구약 역시 성도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부활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부활은 신체적 부활을 의미한다. 다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부활 시에는 의인 뿐 아니라 악인도 함께 부활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악인의 부활을 부정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친다.

(7) 최후 심판과 최후 상태

1) 심판주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주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세례 요한은 증거하기를,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였다(마 3:12).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셨고(요 5:22), 또 그가 다시 오실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 영생할 자들과 영벌(永罰) 받을 자들을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31-48).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께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심판자이심을 증거하였다(행 10:42).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다고 증거하였고(행 17:31), 또 고린도후서 5:10에서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자가 되심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자들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13:41-4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또한 성도들도 심판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고전 6:2-3).

2) 심판의 대상
마지막 심판의 대상들은 우선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들은 타락하고 변절한 천사들이다(마 8:29, 25:41; 벧후 2:4; 계 20:10). 심판의 대상은 또한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 살아 있는 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 모두를 다 포함한다(행전 10:42; 딤후4:1; 벧전 4:5; 계20:12-13; 마 25:34; 고후 5:10; 요 5:24; 고전 6:2-3).

3) 심판의 때
마지막 심판의 때는 죽은 자들이 부활한 후이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계시록 20: 12-13: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마지막 심판은 단일한 사건일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마지막 심판의 날은 복수명사 '날들'이 아니고 단수명사 '날'로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로마서 2:5, 16: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베드로후서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유다서 6: "큰 날의 심판까지."

4) 심판의 근거
마지막 심판의 근거는 사람의 행위들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전 12:14; 롬 2:6; 고후 5:10; 계 2:23, 20:12-13;눅 12:47-48). 또한 심판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는 태도이다(요 3:18, 36; 계 20:15; 마 24:42-25:46)

5) 심판의 성격
하나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로운 심판이다(롬 2:5; 마 12:36; 전 12:14; 롬2:16).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사건이다. 그 심판의 결과,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6) 최후 상태
최후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주로 악인의 상태와 의인의 상태를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우선 악인의 경우는 지옥이라고 불리는 형벌의 장소에 처하게 된다. 이 지옥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영원히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경험하며 살지만, 거기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영원할 것이다. 미래의 형벌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성경의 계시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형벌이 영원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온전히 구원된 의인들은 온 세상이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영원상태인 것이고, 이 때 구원된 성도들은 부활한 몸을 가지고 온전케 된 상태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주요 참고문헌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박희석 역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8)
후쿠마,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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